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12.12 군사반란 (문단 편집) == 반란의 성공 원인 == 무엇보다 당시 전두환이 사령관이었던 [[국군보안사령부]]가 모든 통신망을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에 전두환 측이 진압군을 자기들 손바닥 안에 두고 급박히 돌아가는 상황이나 정보를 훤히 들여다보고 있었다는 점이 가장 결정적인 요인이었다. 또한 [[육군특수전사령부|특전사령부]], [[수도방위사령부|수도경비사령부]], [[대통령경호처|대통령 경호실]] 등 서울과 서울 근교의 주요부대의 대다수를 전두환의 심복들이 장악하고 있었던 점도 결정적인 요인이었다. 당시 대한민국 [[육군특수전사령부|특전사]]의 수도권 4개 여단들 중에 무려 3개 여단의 여단장이 전두환의 심복이었다. [[대한민국 국군]]에서는 [[박정희]]의 밀명에 의해 속칭 군 내부에서의 [[박정희]] [[친위대]]라 할 수 있는 [[하나회]]가 결성되었다. [[하나회]]는 [[전두환]]이 주장(主將), [[노태우]]가 부장(副將)인 상태로, 대통령 경호실에서 [[전두환]]은 작전차장보, [[노태우]]는 행정차장보를 역임할 정도로 박정희가 힘을 실어주었다. 박정희 당시 대통령의 신임을 받던 이 두 사람은 주요 요직을 거쳤다. 심지어 [[베트남 전쟁]]에 파병되었을 정도로 박정희가 공을 들여 키우던 친위세력이었다. 본인 별명인 '물태우' 답게 베트남에서도 기본은 했던 노태우와 달리, 전두환은 베트남에서도 온갖 기행을 벌였으며, 당시 박정희가 베트남 전쟁을 주요한 국군 현대화와 외화 획득 수단, 주한미군 축소 방지 대책으로 판단하고 사활을 걸었다는 점을 생각해 보면 전두환의 행위는 결코 용서받지 못할 행동이었다. 하지만 전두환은 그럼에도 잠시 승진이 미루어졌을 뿐 아무런 조치도 없이, 승승장구한다. 하나회의 리더인 전두환과 2인자인 노태우는 본인들이 이렇게 요직을 거치며 세력을 불렸으며, 여타 요직에도 자기 사람들을 심어놓았다. [[전두환]]은 오랫동안 제1공수특전여단장을 맡았다. 박정희가 좋아서 이렇게 한 것은 아니었는데, 상술하였듯 전두환이 베트남 전쟁에서 기행과 비리를 저질러 군부 상급자들에게 찍힐 대로 찍힌 상태였기 때문이다. 베트남 전쟁의 위치가 위치이고, 전두환의 기행도 상상을 초월했던만큼[* 열대 지역인 베트남에서 온수샤워를 했던 것은 기본이고, 다른 부대원들은 정글에서 죽어나는데, 테니스만 치고 있다는 비토를 받았다. 그나마 이 정도면 똥대령 수준에서 끝났겠지만, '''무기밀매로 적성 무기를 획득해 전공으로 둔갑시킨 것'''은 군인으로서 기본이 안 된 행위였다.] 천하의 박정희도 군부가 가진 전두환에 대한 불만을 찍어누를 수는 없었다. 자연히 전두환의 준장 진급도 늦어졌다. 그렇기에 박정희는 당시 대령이었던 전두환이 맡을 수 있는 최고의 보직인 제1공수특전단 단장을 줬던 것이다. 이후 제1공수가 여단으로 증편되는데, 박정희는 기어이 전두환을 '직무대리'로 두다가 임기제 준장으로 삼아 정식 여단장으로 만들고, 기어이 정식 준장으로 삼는다. 박정희가 얼마나 전두환을 총애했는지 알 수 있는 부분이다. 결국 전두환은 제1공수특전여단의 지휘권을 '''5년이나 가지고 있었다.''' 전두환은 소장이 되면서 [[제1보병사단]]의 사단장으로 영전했으며 후임 1공수여단장 자리는 하나회 후배인 [[박희도]]에게 물려줬다. [[노태우]] 역시 9공수여단장을 거쳐 [[제9보병사단]]장으로 영전했다. 그뿐 아니라 [[장기오]], [[최세창]] 등도 모조리 [[하나회]]에 소속되어 있었는데, 장기오는 5공수여단장, [[최세창]]은 3공수여단장이었다. 한마디로 [[육군특수전사령부|특전사]]의 수도권 여단 4개 중에 3개의 여단장이 모두 [[하나회]], [[전두환]] 패거리들인 상황이었던 것이다. 이런 상황이다 보니 [[육군특수전사령부|특전사]] 여단들 중에 하나회 출신이 여단장으로 있던 수도권 3개의 여단(1, 3, 5여단)은 사실상 [[전두환]] 측의 영향권에 있을 수밖에 없었다. 이런 상황이었기 때문에 [[육군특수전사령관]]인 [[정병주]]는 매우 난처한 상황에 처했다. 박희도, 최세창, 장기오 모두가 하나회 패거리이자 전두환의 심복이었기 때문에, 수도권 4개 여단들 중에서 정병주가 지휘할 수 있었던 부대는 [[갑종장교]] 출신인 윤흥기 준장과 신수종 대령이 각각 여단장과 참모장을 맡았던 [[제9공수특전여단]] 밖에 없었다. [[박희도]], [[최세창]], [[장기오]] 이 세 여단장은 [[전시행정|서류상으로만 부하들]]일 뿐이었다. [[육군특수전사령부|특전사]] 내부에서의 싸움은 자기의 최측근 심복들을 수도권 부대 여단장으로 심어놓은 [[전두환]]의 압승으로 이미 결판이 난 상태였다. 특전사 이외에도 서울의 방위를 담당하는 [[수도방위사령부|수도경비사령부]]의 주요부대들인 30경비단(단장 [[장세동]]), 33경비단(단장 [[김진영(군인)|김진영]]), 헌병단(단장 [[조홍]], 부단장 신윤희)도 모두 전두환의 최측근 심복들이 장악하고 있었다. 차지철이 사망한 이후 [[대통령경호처|대통령 경호실]]마저 전두환이 장악하고 있었는데, 경호실장 직무대리 [[정동호(1935)|정동호]], 작전과장 [[고명승]] 모두가 하나회였다. 결국 정동호와 고명승은 대통령 경호실 병력으로 총리공관을 지키던 헌병들을 제압하고, 최규하 대통령을 사실상 감금하였다.[* 10.26 이후 처음에는 중정부장 김재규의 농간으로 경호실장 차지철이 일으킨 사건으로 판단되면서 대통령 경호실이 사실상 무력화 되었으나, 전두환이 합수부장으로 있으면서 조직이 다시 재건되었다.] 또한 하나회는 아니지만, 후원자들 중 12·12 당시 적극적으로 참여한 [[황영시]]와 [[차규헌]]은 1군단장과 수도군단장으로 서울 서북(파주-문산)과 서남(인천 등) 지역에 부대들을 관할하고 있었다.[* 1군단은 4개 사단(1, 9, 25, 30사단)과 2기갑여단을 거느리고 있는 부대로서 일부 병력이 직접적으로 참여하기도 하였다.] 헌병 또한 병과장인 헌병감 [[김진기]]와 총리공관 경호대장 중령 구정길 등 일부 장교들을 제외한 나머지 주요 인사들[* 범죄수사단장 우경윤, 헌병감실 기획과장 성환옥, 33헌병대장 최석립 등] 대부분이 하나회 인사였다. 진압군 수뇌부 측의 오판도 한몫 했다. 결과와 하나회 멤버들의 배치만 하나회의 계획대로 움직인 완벽한 작전처럼 보이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12·12 군사반란의 실제 진행 과정은 절대 순탄하지 않았다. 일단, 진압군은 '''북한의 동향'''을 고려할 수 밖에 없었다. 대한민국이 북한에게 우위를 갖게 된 것은 정말 이르게 봐도 1980년대 중반 이후이다. 이미 10·26 사건으로 인해 대한민국 전반이 흔들리고 있었고, 북괴 김일성에게 있어 역대급 남침 기회라는 것은 진압군은 물론, 하나회도 알고 있었을 것이다. [[6.25 전쟁]] 자체가 고작 30여년전의 일이었으며, 당장 10·26으로 숙청당한 김재규, 김계원과 12·12 군사반란에서 불법 체포당한 정승화 모두가 6.25 전쟁 [[참전용사]]였다. 당시 북한은 대한민국에 간헐적 공격을 가하고 있었으며, 대표적 사례가 1968년 벌어진 [[1.21 사태]]이다. 대한민국 대통령 박정희를 직접 겨냥한 것으로 유명한 이 사건은, 이 사건 때문에 [[예비군]]이 창설되었고, [[실미도 사건]]이 발생했다는 것만 보아도 1.21 사태가 대한민국에 끼친 영향을 쉽게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당시 [[조선인민군]]이 발휘하는 남침 위협은, 미군을 제외한 대한민국 국군 전력 만으로 [[조선인민군]]을 확실히 묵사발 낼 수 있는 2020년대에는 실감하기 어려운 당시 시대의 특수한 여건이라 할 수 있다. 무엇보다도 당시 군 수뇌부는 '''베트남의 공산화를 직접 두 눈으로 본 사람들이다.''' 이런 상황에서 김일성의 남침 위협을 감수하는 것은 굉장한 용기를 필요로 했던 일이었을 것이다. 국군을 총동원하여 반란군을 쓸어버려야 한다는 강경론을 거세게 주장한 장태완 수경사령관은 6.25 참전용사이자, 당시 총알받이 소위 취급 받았던 갑종 출신에 베트남 전쟁에도 참전한 인물인데, 그의 용기와 혜안이 어느 정도였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진압군이 질 수밖에 없었던 결정적 이유는, 대통령 최규하와 국방부 장관 노재현이 각자 지위의 수행에 걸맞지 않은 무능한 인간들이었기 때문이다. 제3군사령부 사령관 이건영 장군은 비상계엄 아래에서 계엄사령관(정승화)이 유고 상태면 국방부 장관(노재현)의 명령이 있어야 군을 움직일 수 있다는 원칙적 자세를 취했으며, 이것은 장태완 장군, 정병주 장군, 김진기 장군 등 일부 강경파를 제외한 대다수 군 지휘관들의 입장이기도 하였다. 즉, 노재현 당시 국방부 장관의 명령이 있었다면, '''제1군, 제3군 올스타 팀이 서울에 들어올 수도 있었다는 것이다.''' 특전사령부가 꽤 강한 전투력을 가졌고, 보안사령부가 강력한 정보자산을 가지고 있었다곤 하지만 이렇게 되면 그냥 끝난다. 이렇게 중요한 국면에서, 노재현은 큰 오판을 한다. 일단 총성을 듣고 가족들과 도주한 것 자체가 육군참모총장까지 했던 군인이 보일 행동이 아니었다. 그리고 도망쳐서 미8군 사령부 지하벙커로 들어갔으면 그냥 거기 있으면서 사태를 파악하는 편이 나았다. 북한이 습격했든, 쿠데타가 일어났든 당시 한반도에서 가장 안전한 곳이 미8군이며, 미군의 정보자산을 이용할 수도 있었다. 그런데 또 국방부로 털레털레 왔다가 국방부를 급습한 신군부 세력에게 체포당해서 결국 신군부의 편을 든다. 최규하 역시 마찬가지다. 나름 정승화 장군 체포 재가서에 재가 시간을 써서 체포 절차가 부당하다는 증거를 남겼지만, 12·12에서 최규하가 잘한 것은 딱 그거 하나다. '주사'라는 멸칭이 있을 정도로 최규하는 무능하고 우유부단하다는 평을 받았다. 재가서에 재가 시간을 쓴 것에서 알 수 있지만, 최규하는 당시 상황이 정상적인 상황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최규하가 작정하고 '서울을 직접 순시하겠다.' 식으로 뻗대기 시작했으면 신군부 입장에서는 정말 크게 곤란했을 것이다. 애당초 신군부에서는 정승화를 체포하려는 명분(사실상 12·12 군사반란의 명분)으로 10.26 사건에서 김재규와 정승화가 같이 있었으니 수상하다는 것을 내세웠다. 만일 신군부가 최규하를 죽게 만든다면 신군부는 제2의 김재규가 되는 것이며 자신들이 내세운 명분 자체를 잃는다. 뒷감당이 전혀 안 되는 것이다. 아무리 신군부가 군 내부 인사와 요직을 장악했다지만, 당시 대통령은 유신 헌법 아래에서 대한민국 역사상 가장 강력한 권한을 가지고 있었고, 박정희가 휘두른 권력을 최규하 또한 가지고 있었다.[* 부분 계엄이라 국방부 장관이나 계엄사령관이 정국을 지휘하지 않느냐는 의견도 있지만 대통령은 '''국군 통수권을 가지고 있다'''] 이런 상황이라면 충분히 대통령 자의적으로도 반란 진압 명령을 내릴 수 있었으며 여차하면 [[긴급조치]][* 당시 긴급조치는 '''헌법조차도 무력화시킬수있는''', 왕의 [[어명]]에 준하는 수준이었다. 이런 권한을 가지고 국군통수권자라는 위치를 이용하면 반란군 '''따위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을 것이다.]를 날릴수도 있었다. 또한 상술했듯 신군부가 대통령을 죽거나 다치게 만든다면 자신들이 내세운 명분을 잃어버리기에 타국의 쿠데타처럼 대통령을 체포하거나 구금할수도 없었다. 이런 부분들에서 보면, '''최규하가 목숨을 걸고 배팅할 만한 상황이 되었다는 말이다.''' 하지만 최규하는 그런 귀중한 시간을 반 연금 상태에 있는 채, 하나회와 입씨름하며 날리고 만다. 당시 최규하는 전형적인 관료적 마인드에 머무르던 사람으로, 굳이 제주도를 제외한 부분계엄을 내리는 것을 통해 계엄의 책임에서 빠지고자 한 행적을 볼 때, 자신을 군부정권과 민정이양 사이의 징검다리 정도로 치부했던 정황이 보인다. 좋게 말하면 민정이양을 위해 권한을 내려놓은 것이고, 나쁘게 말하면 유신 헌법 시대 대통령의 위치를 망각한 보신주의적 행위를 저지른 것이다. 당시 대한민국은 군인의 나라였고, 민정이양을 제대로 하려면 대통령이 중심을 잡아 군부의 폭주를 제어해야 하는 사상누각의 상태에 처해 있었다. 하지만 최규하는 그런 시대의 특수성을 애써 백안시한 대가를 톡톡히 치른 것이다. [[레임덕]]이 온 [[노태우 정부]] 후반, [[민주자유당]]을 장악하여 하나회를 쓸어버린 [[김영삼]]의 행적과 수완을 생각해 보면, 최규하는 목숨을 걸고 대한민국을 지켜야 하는 대통령에게 필요한 자질 자체가 없었던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9공수가 출동하던 시점은 [[노태우]]가 '''자살'''을 고려할 정도로 반란군 세력에 절체절명의 위기였다. 보안사가 모든 통신을 감청하고 있고 1, 3, 5공수를 장악하여 병력동원에서 우위에 있었다고 하지만, 9공수가 그 어떤 부대보다도 빨리 서울에 진입할 수 있는 상황이었으므로 9공수가 그대로 진입하여 보안사를 공격한다면 반란군은 속절없이 당할 수밖에 없었다. 여기에 육본 수뇌부가 수경사로 옮기지 않고 육군본부 B-2 벙커에 그대로 남은 상황이라고 한다면, 소규모 병력 정도로도 충분히 농성이 가능했을 것이다. 이렇게 버티면서 일단 날이 밝고 나면, 미국은 물론이고 대한민국 국민의 태반이 쿠데타에 절대 호의적이지 않은 상황이었으므로 반란군이 결국 패배하고 말았을 것이다. 물론 반란군이 총리공관을 접수하여 최규하 대통령의 신변을 확보하고 있었지만, 이거 자체가 10.26이나 다를 바 없고, 10.26에서 정승화가 보인 행보가 의심스러우니 체포해야 한다고 주장했던 반란군은 스스로 명분을 잃어버리는 꼴이 된다. 대통령을 인질로 잡아 협상을 한다 한들 반란군 수뇌부의 신변보장 정도를 얻어낼 수 있을지 몰라도 대세 자체를 뒤집어버릴 수는 없었을 것이다. 대부분 보안사의 협박에 넘어가 상황을 오판하고 있었고 육본이 [[신사협정]]을 체결했기에 그랬던 것이지, 전국의 대다수 지휘관들은 처음부터 반란군의 편은 아니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